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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가제: 출판사와 작가와 서점과 구매자

by inmylib 2015. 3. 25.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올린 도서정가제 홍보 영상이다. 이 동영상은 간행물 재정가 공표 시스템(http://www.kpipa.or.kr/reprice/main/main.do)에 올라와 있으며 본 글에서는 유튜브 영상을 공유했다.

 

 

위의 영상은 1분 8초의 짧지 않은 영상으로 도서정가제가 좋은 이유에 대해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도서정가제는 책값의 거품을 걷어내는 역할을 하며, 이를 통해서

1.더 좋은 책을 더 많이 접할 수 있다.(0:30)

2.작가에게는 창작을 할 수 있는 힘을 실어준다.(0:36)

3.거품이 빠진 가격으로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0:40)

 

그리고 도서정가제는 책을 가치로 평가하는 제도라고 소개한다.

 

 

도서정가제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작년 말이었다. 시행 직전, 내 주변에서는 도서정가제 직전의 온라인 서점 염가 세일에 휘말려 그 간 사지 못하고 묵혀두고 있던 책들을 마지막 세일 기회라며 열심히 구입했다. 어디선가 많이 본 풍경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작년 봄에 일본에서 소비세를 5%에서 8%로 인상할 당시의 쇼핑 열풍과 닮았다. 가격이 오를 것이니 미리 사자며 많은 유통업체들이 사람들을 부추겼다.

 

실제 한국에서도 도서정가제 직전에는 매출이 급격하게 올랐다가 직후에는 매출이 확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위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도서정가제로 책값이 올라 사람들이 안 사는 것이 아니라, 정가제 직전의 세일에서 많은 책을 구입한 덕에 상대적으로 구매 의욕과 자금이 떨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출판사들도 창고 대방출 염가 세일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지 작년 여름에는 서점뿐만 아니라 출판사들도 창고세일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제는 도서전이나 북페스티벌에서 도서 세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재고도서를 중고로 간주하고 파나?)

 

 

위의 영상에서 말하는 도서정가제는 만병통치약처럼 보인다. 이걸 시행하면 더 좋은 책이 많이 나오고, 작가들은 더 좋은 책을 많이 쓰고, 사람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읽을 수 있고.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또한 영상 말미에는 "내일은 이 서점이 더 활기찬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또한 흘려 들을 수 없는 것이, 도서정가제의 시행과 함께 죽어가는 지역서점 살리기 운동을 함께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르다. 좋은 책이 나오지 않고, 작가들이 좋은 책을 쓰지 않고, 지역 서점이 죽어가는 것은 그 원인이 제각각이다. 앞의 두 가지는 한 가지로 묶을 수 있지만 맨 뒤의 것은 도서정가제의 영향 때문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번은 출판사가 주체이며 2번은 작가, 3번은 서점이 주체이다. 각각의 주체에 따라 나누어 생각해보자.

 

좋은 책이 나오지 않고 작가들이 좋은 책을 쓰지 않는 것은 책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책이 팔려야 출판사는 더 많은 책을 출간하고 그 중 더 좋은 책을 출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책이 잘 팔리지 않는다면 출판사는 잘 팔려서 회사를 운영하고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책에 눈을 돌릴 것이고, 잘 팔리는 책(베스트셀러)로 만들어 순위권에 올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부정'을 저지르기도 할 것이다. 양서가 잘 팔리고, 잘 팔리지 않더라도 기본 수요가 있어 손해를 보지 않는다면 출판사들이 부정을 저지르고자 유혹 당하는 확률은 낮을 것이라 본다. 결국 시장이 작고 그 작은 시장마저도 점점 축소된다는 것이 큰 문제일 것이다.

짧게 정리하면 출판사가 더 좋은 책을 출간하지 않는 것은 팔리지 않고 더 나아가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책을 써도 팔리지 않기 때문에 좋은 책을 쓰더라도 그걸로 먹고 살 여력이 되지 않으며, 생계를 위해 일하다 결국 좋은 책을 쓰기 위한 기회나 시간, 힘을 잃는다. 처음부터 전업작가로 시작하는 경우는 많지 않으며, 순수문학 외의 다른 분야에서는 보통 관련 직업을 가지고 있어 그걸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책을 쓰고, 그리고 잘 팔리면 전업작가가 되기도 한다.

어느 쪽이건 책 쓰는 것만으로 생계유지가 가능한 사람은 많지 않다고 알고 있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는 찾아보지 않았지만 이후 찾게되면 보충하겠다.) 그런데 도서정가제를 도입함으로써 작가들이 좋은 책을 쓸 기회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을까. 도서정가제는 도서의 할인율을 낮춰 가격을 일정수준으로 고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격을 고정한다고 해도 작가들의 수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들의 수입은 인세의 비율과 판매량에 달려 있는 것인데, 도서정가제의 도입이 이 둘 중 어딘가에 영향을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홍보영상에서는 이 중 후자, 판매량이 증가하여 작가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는 것 같으나 정말로 영향을 줄 것인지는 지켜 봐야 알 것이다.

즉, 지금의 상황만 봐서는 도서정가제가 작가들이 좋은 책을 쓰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세 번째. 지역 서점 살리기는 어떠한가.

앞의 두 건은 도서의 판매량과 관련이 있으나 지역서점의 몰락은 도서의 판매량보다는 판매방식의 문제이다. 지역 서점이 점점 사라진 것은 인터넷 서점의 등장과 대형 체인서점의 등장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예스24와 인터넷 교보문고, 알라딘 등 인터넷 서점의 확장은 간편한 책 쇼핑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여기에 지역서점의 몰락에 방점을 찍은 것은 직전까지 시행되었던 도서정가제이다. 여기서는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할인이 불가능하며, 인터넷 서점은 신간 10%의 할인이 가능하고 출간 후 18개월이 지난 도서는 추가 할인도 가능하게 제공하였다. 즉 온라인 서점의 할인에 오프라인 서점이 버티지 못하고 사업을 접은 것에 가깝다. 여기에 다양한 놀거리의 증가로 1인당 독서량의 감소와 독서구매액의 감소가 더해지니 지역서점들은 판매부진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몇몇 지방도시에 체인 서점이 들어설 때 각 지역의 서점연합회 등이 반대한 것도 볼 수 있는데, 대형마트에 사람이 몰리는 것과 비슷하게 대형서점도 같은 상황을 겪었다. 특히 책은 진열공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상품이므로 작은 서점에서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에 대응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며, 대형 서점은 그만큼 유리한 고지에 놓인다. 또한 포인트 제도 등은 지역 서점에서 대처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었을 것이다.

 

지역서점 살리기와 관련해서는 일본의 사례도 참고할만 한데 『서점은 죽지 않는다』에서는 일본 각지의 소규모 서점을 소개하고 있으며 이런 서점들은 각각의 분야에 맞춰 전문서점으로 살아 남고 있다. 그렇지 않다 해도 서점 주인이나 종업원들이 서점을 독특하게 구성하고 지역의 상황에 맞는 책을 제공하는 등 다양한 방식을 고안하고 있다.

(그렇지만 상황은 그리 밝아보이지 않는다. 아직 읽는 중이라 끝까지 다 봐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책 자체가 몇 년 전에 나온 것이라 최신 상황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지역서점이 무너지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이전의 도서정가제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할인의 차등 적용인 것은 맞으나, 그보다 앞서 지역서점이 자생할 노력이 부족했고, 국민들의 도서 구매력이 현저하게 줄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을 것이라 본다.

 

 

따라서 도서정가제의 도입이 도서구매력의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세 가지가 해결되는 것은 요원하다. 단지 도서정가제를 도입하는 것만으로 세 가지가 마법처럼 해결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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